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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3화 함정 이수경!
순간 엽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렇다면 선각자에 의해 봉인돼 있었던 이수경을 자신이 풀어 주었단 말인가!
이수경이 자유를 되찾았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수경 안의 요수들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것 아닌가!
당했다!
엽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내려앉았다. 항상 남을 속이는 데 익숙했지, 정작 자신이 계략에 빠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걱정했어야 하는 것은 바깥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의 처지였다.
게다가 여인의 실력은 그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은가!
[구층 형님, 계십니까? 똑똑.] [네, 안 계십니다.] […….]
구층 존재 역시 개입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이때 여인의 실시간파워볼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한 번 시도나 해 보려 했건만, 진짜로 걸려들 줄은 몰랐구나! 이렇게 간단히 봉인을 풀어 주다니, 이건 필시 하늘이 날 돕는 것이다. 하하하!” 이때 엽현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설마 구해 준 은혜를 원수로 갚진 않겠지? 그건 하늘의 뜻일 리가 없잖아.” “흥! 하늘 따위보다 내 뜻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너희 뻔뻔한 인간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 특히 그 선각자 놈은 자기가 무엇이기에 내 자유를 제한했단 말이냐? 정녕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는 원래 널 소멸 시킬 생각이었는데, 살려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 아닌가?” 엽현의 이 말은 여인의 성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무지한 놈! 날 죽이지 않은 것은 놈이 멍청했기 때문이다!” “…….”
엽현은 솔직히 선각자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선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푼 것이지만, 적은 그것을 고마워하기보다 멍청하다고 생각한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인가!
“네 놈이 말 해 보거라!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날 봉인할 수 있단 말이냐!” “하…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말해!”
“자격이 뭐가 파워볼게임 필요해? 그가 너보다 강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한 거지.” 엽현의 대답을 듣자 여인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엽현의 입에서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점점 여인의 화가 누그러들고, 주변을 가득 메우던 살기 역시 줄어들었다.
“네 말이 맞다. 처음부터 자격은 필요 없었어. 그저 내가 그보다 약했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됐을 뿐이지.” “음… 생각을 좀 달리 해 보는 건 어떨까?” “어떻게 말이냐?” 엽현이 주저하듯 말하자 여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러니까, 비록 그가 널 봉인하긴 했지만, 결코 살수를 쓰진 않았잖아. 오히려 너희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질 좋은 영맥도 공급해 주고 말이지. 그 덕분에 이곳의 생령들도 더 강해질 수 있었던…….” “그럼 내가 널 가둬 놓고 매일 좋은 음식을 먹여주면 넌 내게 고마워할 테냐?”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유! 엔트리파워볼
엽현이 한 가지 놓치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자유의 유무였다.

만약 여인의 말대로 의지와 상관없이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면 하루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 ‘아니오’였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간 후에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
이때 여인이 자조 섞인 EOS파워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마음속에 독을 품으며 살아왔다. 그 덕에 네가 보는 대로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지.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보니 무엇 때문에 그리 살았나 싶구나. 세상은 강자에 의해 흘러가는 것이니, 내가 당했다면 그것은 애당초 무능한 나의 잘못인 것을.”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와 함께,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 역시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엽현의 안색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그가 알기로 로투스바카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정신 나간 미친년이 아닌, 정신이 돌아온 미친년이었으니까.
설마, 제 정신을 찾은 기념으로 내 목부터 베려는 건 아니겠지?
근심이 가득하던 이때,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꼬마, 말 해 보거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느냐?” 이에 엽현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너는 나보다 강하다. 그러니 당시 선각자가 네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너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않아?” 순간 여인은 엽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슴츠레 눈을 떠 이 모습을 확인한 엽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방금 전 한 마디가 먹혀들어 갔던 것이다.
잠시 후, 여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가 만약 평범한 무인이었더라면 널 보내 주었을 것이다.” 평범한 무인? 그 말은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소린가?” “너는… 그의 후계자니까.” 후계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엽현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보고 선각자의 후계자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 네 몸에 선각자의 탑이 있는 걸 모를 줄 알았느냐?” “아니, 그건 오해…….” 엽현이 황급히 변명해 보려 했지만, 여인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할 운명인데 뭘 겁내는 것이냐? 검수란 놈이 그 정도 배짱도 없는 게냐?” 그 말을 들은 엽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죽는 거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검수의 목숨은 목숨도 아니냐!” “후후, 그럼 인과는? 너는 인과를 믿느냐?” 인과?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과는 예측할 수 없는 운명 따위와는 달랐다.
인이 있으면 과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제 말이 통하겠구나. 당시 네 사부가 날 봉인한 것이 ‘인’이라면, 오늘 그의 제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이 바로 ‘과’가 아니겠느냐?” “그건 경우가 다르지! 굳이 이치를 따지자면 너를 봉인한 것은 선각자이니, 그를 찾아가 복수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 “그러고 싶지만… 놈은 너무 세.” “……그래서 대신 날 죽인다고?” 엽현이 황당한 얼굴로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널 죽이면 내 기분도 조금은 풀리겠지?” 그 말에 엽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인과를 들먹인 것은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함이었을 뿐, 실상은 만만한 자신에게 화풀이나 하겠다는 것 아닌가!
[구층 형님, 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지금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죽습니다!] 잠시 후, 구층 존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도 부탁 좀 하자. 형님으로 모실 테니까 좀 약한 놈으로 데려올 수는 없는 거냐? 네 놈의 적들은 왜 하나 같이 이런 괴물밖에 없단 말이냐! 그 철검을 든 아이는 그렇다 치고, 이 여자는 또 얼마나 살았는지도 모를 괴물이 아니냐! 제발 좀 비리비리한 놈으로 골라 오면 어디 덧나는 게냐?] [아이고, 억울해라. 이번 건 딱히 내가 시비를 건 것도 아니지 않소!] [그건 아니지. 하지만 이 여자의 봉인을 해제한 건 네 그 빌어먹을 손이었지.] 그 말에 엽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 위기는 분명 자신이 바보같이 굴었던 탓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는 약삭빠르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그의 인생에 크나큰 오점을 남긴 것이었다.
“하하, 겁먹은 표정을 보니 매우 즐겁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널 죽이는 대신 선각자가 내게 했던 것처럼 이 나무에 봉인시켜 줄 테니. 어디, 이곳에서 영원히 자유를 잃은 기분을 만끽 해 보거라. 하하하!” 말을 마친 여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뒤이어 막 출수하려는 이때, 여인이 돌연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녹슨 철검을 든 소녀가 여인을 똑바로 노려보며 서 있었다!
“천맥자(天脈者)… 너는 이 일과 상관없으니 관여할 생각 하지 말아라!” 소녀는 대꾸하지 않고 검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이를 본 붉은 치마의 여인이 비꼬듯 웃음을 터트렸다.

“천맥자로 태어났지만, 영지에 손상을 입었으니 가련하기 그지없구나. 어차피 정상으로 살기는 글렀으니, 다음 생애를 기약 해 보거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여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조심해!”
엽현의 외침이 울려 퍼진 순간, 소녀가 제 자리에서 번쩍 뛰어올라 그대로 철검을 내리쳤다. 검기도, 검광도 없는 평범한 검.
하지만 엽현은 철검에 깃든 강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무적검체술을 익힌 자신이라도 이 검은 받아낼 수 없으리라!
쾅-!
소녀의 검이 떨어진 순간, 굉음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튕겨 날아갔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붉은 치마의 여인!
여인이 채 자리에 멈춰 서기도 전, 소녀가 허공에 일검을 휘둘렀다.
쉭-!
소녀 앞의 공간이 갈라지는 순간, 여인이 황급히 손을 모았다 벌렸다.
“천우(天佑)!” 그 순간, 여인 정면의 공간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이때, 소녀의 검이 들이닥쳤다.
쾅-!
다시 한번 폭음과 함께 여인이 백여 장 밖으로 밀려났다. 방금 전 폭발이 일어난 자리는 이미 한편의 암흑으로 변해 미친 듯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 붉은 치마의 여인이 소녀를 노려보며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간멸(間滅)!” 외침과 함께, 이번에는 소녀가 있던 공간이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녀가 돌연 검을 들어 자신의 가슴 부분을 가격했다.

쾅-!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여인의 몸이 활처럼 구부러져 날아갔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여인의 가슴에는 깊은 검상이 생겨나 있었으며, 입가에는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은 여인이 원망 섞인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천맥자, 고작 놈에게 사탕 하나 얻어먹은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소녀는 아무 대꾸 없이 검을 들어 스스로의 목을 겨냥했다. 이를 본 순간 여인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천맥자,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 여인이 이번에는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죽어 마땅할 인간! 네 목은 언젠가 내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엽현이 이에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죽어 마땅할 여자! 내가 ‘충전’이란 걸 할 줄 알게 되면 내 친구가 널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여인은 마지막으로 소녀를 표독스럽게 노려본 후, 순식간에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엽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정말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순간이었다.
이때, 소녀가 엽현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녹슨 검으로 가볍게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옭죄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다.
“고, 고마워!” “…….”
잠시 엽현의 눈을 응시한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에 엽현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다시 대도촌으로 돌아온 두 사람.
이때 하늘은 이미 희끗희끗 밝아 오고 있었다.

소녀는 다시 잠자리에 드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사탕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정면에서 소녀를 볼 수 있게 된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녀의 가슴 부근에는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이는 조금 전 붉은 치마 여인을 공격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아프지 않아?” 소녀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엽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엽현은 생명수 한 병을 꺼내 들고서 소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 이거 받아.” 병을 받아 든 소녀가 물끄러미 엽현을 바라보았다.
“하하, 맛있는 거야, 쭉 들이켜!” 이때 소녀가 곁에 있던 검은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이에 엽현이 또 다른 병 하나를 꺼내 강아지 앞에 놓았다.
그러자 강아지가 ‘왕’ 하고 짖더니 엽현의 발에 몸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강아지 앞에 놓인 병을 보자 소녀는 그제야 생명수를 들이켰다. 하지만 반쯤 마셨을 때, 소녀가 동작을 멈추더니 엽현에게 병을 들이밀었다.
나눠 마시자는 의미였다.
순간 엽현은 마음이 따듯해져 옴을 느꼈다.
웃는 얼굴로 등 뒤에 칼을 꽂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
이런 세상에도 아직 콩 한 쪽 나눠 먹는 정은 남아 있던 것이다.”